▶ 출처 : https://www.motortrend.kr/news/articleView.html?idxno=255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놀랐습니다. 잡지가 굉장히 많네요. 집에는 저것보다 더 있어요. 좋은 글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봐도 기분이 좋아지는 매력이 있어요. 한 번씩 꺼내 읽는데, 읽기 시작하면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요. 글을 읽으면 그 당시 제가 느꼈던 감정과 추억들이 떠오르기도 하니 되게 재미있어요.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잡지를 사서 봤으니까 거의 80년대 후반부터 잡지를 본 셈이네요.
모터트렌드 필진으로도 참여하셨더라고요. 아이가 태어난 직후였어요. 아빠의 입장에서 알려주는 자동차 문화를 칼럼 시리즈로 연재했죠. 아이한테 쓰는 편지 형태로 되어 있어요. 상황에 맞게 운전하는 방법, 필요한 매너 등 아이가 커가는 모습에 따라 생각났던 주제들을 연결해서 썼죠. 되게 좋은 기억이에요. 언젠간 그 이야기들을 다시 묶어서 책으로 내고 싶어요. 그리고 기사의 주인공이 된 적도 있어요. 2008년쯤으로 기억해요. 아마추어 레이스를 나가는 직장인으로 인터뷰 기사가 실린 적이 있죠. 벌써 16년 전 이야기네요. 첫 인터뷰와 이번 인터뷰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고 자동차 근처에서 재미있게 살아왔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 시간 동안 직업은 여러 번 바뀌었지만 언제나 자동차 곁에 계셨네요. 그냥 자동차가 좋았기 때문이에요. 제가 잘할 수 있고, 잘 아는 분야에 욕심이 있었죠. 그래서 글을 쓰든, 운전을 직접 하든, 운전을 가르치는 식이든, 혹은 자동차 회사에 근무하는 등 계속해서 맴돌았던 것 같아요.
레이스 무대에도 오래 계셨죠. 깨달은 게 많으실 것 같아요. 모터스포츠 경기를 한 번 하면 우승자 1명 외에는 모두 패자가 돼요. 사실 가혹한 스포츠라고 생각이 들어요. 경기 하나를 치르기 위해 엄청난 비용과 노력이 들어가는데, 좋은 결과물을 만드는 게 굉장히 힘들어요. 쉽게 이야기하면 가성비가 좋지 않은 스포츠인 거죠. 1등을 하지 못하면 그날은 지고 오는 느낌이잖아요. 그래서 이기고 지는 것을 배운 것 같아요. 진다고 해서 패배감을 느끼기보다 내가 꼭 이기지 못할 수 있고, 이기지 못한다고 해서 세상이 끝나는 게 아니라는 게 중요하죠.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내려놓게 된 거죠. 그리고 또 실패하거나 지는 날 때문에 이기거나 성취하는 날이 왔을 때 제대로 즐길 줄 알게 되는 것 같아요. 지는 법을 배웠다고 해야 할까요? 유능하고 재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지는 걸 견디지 못해 금방 포기하고 떠나는 선수들도 많아요.
그것을 배우는 과정이 순탄하진 않았겠네요?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 떠오르네요. 뉘르부르크링 24시 내구 레이스에 도전할 때 큰 사고를 겪었어요. 당시 스폰서에서 지원한 자금과 제 퇴직금을 모두 모아서 대회에 참가했거든요. 대회 참가 자격을 획득하기 위한 레이스에서 차가 크게 손상됐어요. 그때 준비했던 돈도 거의 떨어지면서 동시에 제 자신감도 완전히 꺾인 시기였어요. ‘내가 24시 레이스에 나갈 수 있을까? 이 경기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는 진짜 좋은 레이서인가?’와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마구 던지며 자존감이 바닥까지 내려갔죠.
그런데 대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운명 같은 일이 일어났어요. 우연히 다큐멘터리 필름 하나를 보게 됐는데요. 알렉스 자나르디라는 레이서의 이야기가 담긴 영상이었어요. 사고로 두 다리를 절단하게 된 레이서가 의족을 끼고 페달 대신 손으로 브레이크와 스로틀을 조작하는 장치를 만들어 대회에서 우승하는 과정이었죠. 그 다큐멘터리를 본 뒤 아직 바닥까지 떨어진 것도 아니었다는 생각을 했고, 다시 도전하겠다고 마음먹었죠. 돌이켜보면 그때의 결심이 지금의 제가 만들어진 자양분이 됐어요.
자동차 취향이 궁금해요. 요즘 올라운더가 대세인 것 같은데, 저는 육각형 자동차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래프를 그리면 완전히 삐죽한 모양을 가진 차를 좋아하죠. 장점과 단점이 확실한 차. 정말 큰 단점이 있어도 그걸 엎을 수 있는 큰 장점이 있는 차들이 취향이에요. 클래식카 중에서도 지금까지 사랑받는 차는 그 당시에 징글징글한 말썽이 많았던 차들이 살아남더라고요.
그럼 소유했던 자동차도 이력이 특이했겠네요. 첫 차는 현대 스쿠프 터보였어요. 7년 된 중고차였죠. 엄청나게 많은 튜닝을 해봤습니다. 당시 투스카니가 막 나온 시점이었기에 투스카니를 잡고 싶은, 이른바 ‘언더독’ 성향이 강했죠. 두 번째 차가 원메이크 레이스를 나가기 위해 샀던 현대 클릭이었고, 군대를 다녀와서 후기형 클릭을 한 번 더 샀습니다. 여기까지 저의 철학은 철저한 경량이었어요. 셋 다 1t을 넘지 않았거든요. 그때는 가벼운 무게가 주는 이점에 큰 매력을 느꼈어요. 다음 차는 첫 수입차인 혼다 S2000이었어요. 2년 정도 보유했어요. 그리고 아반떼 MD 원메이크 레이스를 나가기로 결정했고, 급하게 차가 필요했어요. 중고차도 마땅한 매물이 없어서 신차 깡통 모델을 주문했고요. 그 차도 2년 정도 탔네요. 그리고 로터리 엔진이 너무 궁금해서 마쓰다 RX-8도 탔습니다. 이후 토요타 86, 크라이슬러 300C SRT, 제가 상품을 기획했던 지프 레니게이드도 보유했었고 박스터 987을 거쳐 911 카레라와 지프 랭글러 4xe를 타고 있네요.
정말 하나같이 육각형과 거리가 먼 차들이네요. 맞아요. 지금 타고 있는 랭글러 4xe도 엄청 불편한 차예요. 그래도 너무 좋아하면서 타고 있어요. 또 제가 좋아하는 차들은 불편한 구석이 있지만, 불편해서 죽어도 못 타겠다고 느끼지는 않거든요. 불편하면 불편한 대로 그냥 타면 된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지금 운영하는 채널, Station.B는 어떤 의미에요? 자동차는 미학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존재라고 늘 생각했어요. 디자인도 예쁘게 보일 수 있지만, 자동차가 움직이는 그 자체가 아름다울 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그 아름다움을 뜻하는 뷰티(Beauty)라든지, 디자인 용어인 볼드(Bold)처럼 제가 생각하는 정체성을 모아보니 공통적으로 B가 붙더라고요. 거기다 제 이름이 ‘병휘’인 것도 B의 의미에 포함할 수 있겠네요. 어쨌든 저희 채널의 정체성은 얕고 넓은 것 말고, 깊고 좁게 들어가는 것이에요.
크리에이터와 레이서의 자아 중 무엇이 더 큰가요? 아무래도 이제는 크리에이터의 자아가 더 커진 것 같아요. 30대까진 레이서가 저의 가장 큰 자아라고 생각했거든요. 요즘도 종종 대회가 있을 때 잠시 레이서 모드로 바뀌긴 하지만 이제는 크리에이터로의 삶이 더 중요한 것 같아요.
말씀을 들어보니 여기서 멈출 분은 아닐 것 같은데요. 일단 스테이션.B는 잠시 숨 고르기를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원하는 콘텐츠를 마음껏 펼치진 못했던 것 같아요. 신규 PD를 채용해서 저희 채널 컨셉트에 맞는 무언가를 하려고요. 이 글을 읽는 예비 지원자분들이 있으시면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웃음). 또 자동차 제조와 개발과 관련된 부분을 시작하려고 준비 중이고, 단기적으로는 저희만 판매할 수 있는 자동차 관련 제품 판매를 준비하고 있어요. 그리고 SK와 협업해서 저희가 기획 및 개발 과정에 직접 참여한 엔진오일, 그리고 운전을 좋아하시는 분들에게 어필할 고성능 튜닝 제품 또는 드라이버스 웨어도 생각하고 있어요.
로망이 있나요? 내연기관 한 대와 전기차 한 대씩 꼽아주세요. 내연기관의 로망은 911 싱어가 가장 먼저 떠오르네요. 클래식카 보디를 가져다가 최신형 모터스포츠 테크놀로지를 넣은 게 내연기관 로망의 끝판왕이죠. 그리고 로망을 가지고 있는 전기차는 아직 양산되지 않았어요. 그런데 아마 곧 나올 거예요. 제가 영국 굿우드 페스티벌에서 본 케이터햄의 새로운 EV 모델이 있거든요. 전기차인데 1t이 나가지 않는, 순수한 운전의 재미를 추구하는 차에요.
드라이브할 때 어떤 음악을 들으세요? 의외로 힙합을 많이 듣습니다. 아시는 분들이 거의 없긴 한데, 대학교 시절 힙합 동아리도 했어요. 그리고 빠른 페이스로 주행하면 R&B나 재즈 같은 템포가 느린 음악 위주로 들어요. 빠른 음악은 오히려 집중에 방해가 되더라고요.
좋아하는 모터스포츠 선수는 누구인가요? 발터 뢸이에요. WRC 그룹 B 시절 2륜 레이스카로 4륜 레이스카를 이기는 엄청난 실력과 더불어 ‘페달 댄스’라 불리는 화려한 풋워크가 저를 매료시켰어요.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운전하고 싶은 차가 있나요? 1991년 르망 24시에서 우승했던 마쓰다 787B입니다. 귀곡성 사운드가 예술인 그 차 때문에 RX-8을 샀어요.
끝으로 독자분들에게 인사 부탁드립니다. 많은 분들이 좋아해 주고 계시지만 또 한편으로는 아직 저희 채널의 존재를 모르시는 분들도 계시는 것 같아요. 혹시 못 보셨다면 꼭 한번 오시길 바랍니다. 아직 제가 보여드리고 싶었던 콘텐츠의 반의반도 보여드리지 못했으니 앞으로 만들어갈 콘텐츠를 기대해 주세요. ■
글 조현규 에디터 사진 주보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