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 https://www.motortrend.kr/news/articleView.html?idxno=2856
어린 시절 제게 르망 24시는 1년에 한 번쯤 자동차 잡지에서나 읽을 수 있는 이벤트였습니다. 위성이나 케이블로 외국 스포츠 채널을 볼 수 있는 집이 아니라면, 한국에서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종목이었죠. 24시간을 쉬지 않고 달린다는 극한의 레이스는 그저 먼 나라의 이야기였습니다. 잡지 속 사진 몇 장과 결과 기사를 읽으며 그 밤의 공기를 상상해보는 게 전부였고요.
하지만 세상은 계속 변하고 있었습니다. 그사이 한국의 자동차 시장은 몰라보게 성장했고, 몇 가지 이유 덕분에 F1을 필두로 모터스포츠에 대한 관심도 크게 자랐습니다. 그 훈풍을 가장 먼저 받은 건 아마 WEC인 것 같습니다. 해외 언론들은 다시 한번 황금기가 도래했다고 말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브랜드가 최상위 클래스인 하이퍼카에 뛰어들고 있으니까요. 물론 거기에도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 지면에서 하고 싶은 건 그 이야기가 아닙니다.
대한민국은 유명한 모터스포츠 불모지였습니다. 어쩌면 아직 현재 진행형인지도 모르겠네요. F1 그랑프리를 개최하던 때도 있었지만 잠깐이었고, 포뮬러 E도 다녀갔지만 단 한 번의 만남 이후 영영 소식이 끊겼죠.
그래도 분명 달라지고 있습니다. 국내 F1 팬은 눈에 띄게 늘어가고, 슈퍼레이스와 N 페스티벌 같은 국내 리그도 매년 장족의 발전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현장을 찾는 관객이 해마다 늘어가는 게 그 증거겠죠. 그래서일까요. 어느덧 SPOTV가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의 참가와 함께 WEC를 중계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이미 아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저는 2024년부터 SPOTV에서 포뮬러 E 해설위원으로 생중계를 함께해왔습니다. 감사한 기회였고, 포뮬러 E 현장 취재를 다녀온 경험까지 살려 국내 시청자들에게 이 재미를 전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올해부터는 WEC의 해설위원으로도 활동하게 됐죠.
이몰라, 스파를 지나 열리는 르망 24시. 스포츠 종목의 24시간 생중계는 대한민국 최초라고 합니다. 정확히는 약 26시간이죠. 레이스 시작 전의 시간, 그리고 레이스 후 인터뷰와 시상식까지가 있으니까요.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역사적인 순간을, 오랜 시간 진심으로 준비한 이들과 함께 걸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뒷이야기에 가깝습니다. 모든 일은 WEC 첫 중계였던 이몰라 6시간에서 나온 해설위원들의 한마디, "이거 되겠는데요?"에서 시작됐습니다. 이몰라는 시작 2시간, 끝나기 전 2시간만 방송했거든요. 중간에 다 같이 쉬는 시간이 있었죠. 6시간 정도는 할 수 있겠다는 말에, 바로 다음 경기인 스파 6시간부터 풀 중계가 시작됐습니다. 저와 장영태 캐스터가 첫 주자로 6시간을 쉬지 않고 달렸죠.
가능성을 본 SPOTV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르망 24시간 전체 생중계를 선언한 겁니다. 그때부터 더 철저한 준비가 시작됐습니다. 방송을 만드는 PD와 엔지니어 분들은 제가 보지 못하는 시간과 공간에서 제 상상을 초월하는 준비를 하셨을 테고요. 저는 어떤 준비를 했냐고요? 최대한 정확하면서도 흥미로운 정보들을 긁어모으고 정리했습니다. 팀과 드라이버, 규정과 서킷, 역사와 기록까지. 꽉 채운 A4로 대략 150페이지 분량이 나오더라고요.
시간은 끊임없이 흘러 어느덧 운명의 6월 13일 밤이 왔습니다. 제가 첫 순서였고요. 전날 퀄리파잉과 하이퍼폴 중계로 몸은 한 번 풀어둔 상태였습니다. 짝을 이룬 김명정 캐스터의 눈에도 평소와 다른 긴장감이 엿보였습니다. 제가 아는 가장 베테랑 캐스터인데, 긴장하는 모습은 처음 봤습니다. 그렇게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고, 방송이 시작됐습니다.
경기 시작 전 수많은 정보가 흘러갔고, 어느새 화면에서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연주되며 60여 대의 레이스카가 달리기 시작합니다. 전율이 일었습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르망 24시간 생중계, 그 시작을 제가 알렸습니다. 역사의 한 장면에 제 목소리를 남긴다는 사실에 잠시 감격에 젖었지만, 금방 정신을 차리고 해야 할 일에 집중했죠.
내구 레이스니까 그들의 용어를 빌리자면, 해설진의 스틴트는 약 3시간 30분에서 4시간 30분을 기준으로 돌아갔습니다. 저는 총 세 번 중계석에 앉았네요. PD와 엔지니어 분들은 그보다 훨씬 긴 시간을 버티며 교대했다고 합니다.
쉬는 시간엔 푹 쉬었냐고요? 아쉽게도 그러진 못했습니다. 한 장면이라도 놓쳤다가 제 차례에 설익은 정보로 해설하게 될까 봐, 쉬는 동안에도 중계 화면과 라이브 타이밍을 지켜보며 분석했죠. 첫 휴식 때 2시간, 두 번째 휴식 때 1시간 정도 눈을 붙인 게 전부였습니다. 스튜디오 한쪽 분장실에 간이침대를 펴두고 말이죠.
함께한 해설위원들은 어떤 분들이냐고요? 모르시는 분들도 많으실 겁니다. 가장 어른이신 최장한 해설위원은 한국인 최초의 뉘르부르크링 24시 도전자이자 최초 완주자, 그리고 최초 우승자이십니다. 본업은 자동차 회사의 연구원이고, 서스펜션 전문가라고 하십니다. 공학적인 지식에 내구 레이스 선수의 관점까지 더해 이야기를 풀어주셔서 늘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임채원 해설위원은 한국인 최초의 F3 우승자이십니다. <더 랠리스트>라는 프로그램에서 최종 우승한 뒤 한국인 최초로 WRC에 이름을 올려 활약하셨죠. 내구 레이스와 드라이버들에 대한 풍부한 지식, 다양한 무대를 직접 뛰어본 경험담을 듣고 있으면 그저 놀랍기만 합니다. 두 분은 빠른 시일 내에 저희 지면에 모시려고요. 자세한 이야기는 그때까지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중계의 흐름을 만들어가는 캐스터는 김명정, 장영태, 김영찬 세 분입니다. 김명정, 김영찬 캐스터는 포뮬러 E를 함께했고, 장영태 캐스터와는 WEC에서 처음으로 합을 맞춰봤습니다. 세 분 모두 극한의 E 성향이라 이야기가 시작되면 그 입담 속에 시간 가는 줄을 모릅니다. 아쉽게도 저의 포뮬러 E 메이트인 김영찬 캐스터와는 르망에서 합을 맞추지 못했습니다. 포뮬러 E에서 활약하는 드라이버가 많은 WEC인 만큼, 함께였다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더 많이 나왔을 텐데 말이죠.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의 17번 레이스카가 리타이어하던 순간으로 꼽고 싶습니다. 모두가 말을 잃고 충격에 빠졌던 순간이었죠. 그리고 우리 모두 그 짧은 순간에 많은 것들을 분석하고 나름의 이유를 추론했습니다. 최장한 위원님이 중계에 들어가기 전 “항상 가장 젊은 드라이버가 사고를 친다”고 말씀하셨는데, 거짓말처럼 가장 어린 마티스 조베르의 차례에 사건이 발생했죠. 막내인 조베르에게 가장 맏형인 안드레 로테러는 가장 먼저 어떤 말을 전했을까요? 앞서 로테러 인터뷰 기사에 그 이야기도 담아두었습니다.
그 외의 시간은 대부분 자그마한 분장실에서 함께 무언가를 먹으며 중계를 보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마치 대학 시절 자취방에 모여 스포츠 중계를 보는 분위기였어요. 남자들이란 나이를 막론하고 다 비슷비슷한가 봅니다.
중계 중에는 SPOTV 앱의 실시간 채팅도 주의 깊게 살폈습니다. 워낙 호흡이 긴 레이스인 만큼 피어나는 만담도 중요한 포인트였거든요. 덕분에 여러 명장면이 만들어졌습니다. '야식 메뉴 추천해주세요'부터 '첫사랑 이야기해주세요'까지, 별별 채팅이 다 있었죠. 하이라이트를 모은 영상은 유튜브에서 다시 볼 수 있습니다. QR코드로 남겨드릴 테니 봐주세요. 그리고 나름대로 재미있는 멘트를 하나 던진 뒤 채팅창에 쏟아지는 무수한 'ㅋㅋㅋ'를 보고 있자면, 강력한 도파민이 분출됐습니다.
마지막에는 세 명의 해설위원이 모두 투입됐습니다. 농담 삼아 나머지 캐스터 두 분도 들어와 그냥 6인 중계를 하자는 이야기까지 나왔네요. 어쨌든 네 명의 중계진이 나란히 앉으니, 채팅창에 '네(4)구(口) 레이스 중계'라는 말이 올라왔습니다. 다들 창의력이 어쩜 그렇게 좋으신 걸까요.
길고 길었던 24시간의 끝엔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 19번 차의 완주가 있었습니다. 다들 박수를 치며 진심으로 기뻐했어요. 저 역시 24시간 레이스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건 처음입니다. 중계 때마다 말씀드리는 '내구 레이스는 계속 지켜보는 레이스가 아닙니다'라는 조언을, 정작 저 자신은 실천하지 못한 셈이죠. 그리고 그만큼 뜻깊은 경험이었습니다.
고백하자면, 제게 모터스포츠 저변을 넓히겠다는 거창한 목표 같은 건 없습니다. 다만 제가 재미있게 즐기는 이 스포츠에 누군가 입문하려 할 때, 어디를 어떻게 보면 재미있는지 알려주는 것. 눈앞의 낯선 것들을 친숙하게 만들어주는 것. 그게 제 역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진심이었습니다. 최선을 다했다는 말보다는, 진심을 다했다는 말을 쓰고 싶습니다. 그래서 진심을 다해 준비했고, 주어진 시간에 모든 걸 쏟아내려 애썼습니다. 부디 그 마음이 잘 전해졌기를 바랍니다.
인터넷 페이지에서 잘 쓰지 않는 '-습니다'체로 글을 남기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그들과의 소중한 기억, 그리고 첫 24시간 중계라는 의미 있는 기록을 누군가는 글로 써두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이왕이면 그날 마이크 앞에서 시청자들께 건넸던 말투 그대로요. 물론 담고 싶은 이야기가 더 많이 남아 있습니다. 글을 쓰는 내내 중계석에서의 도파민이 다시 도는 것 같아요. 하지만, 이만 줄일게요.
아마 내년에도 이 여정은 다시 돌아올 것 같습니다. 그날이 벌써 기다려지네요. 물론 그 전에, 올해 WEC는 아직 절반인 네 경기가 남았습니다. 남은 네 경기도 저와 함께해주실 거죠?
글 조현규 에디터 (SPOTV 모터스포츠 해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