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 https://www.motortrend.kr/news/articleView.html?idxno=2739
떠난 이유는 단순하다. ‘진정한 드라이버라면 죽기 전에 사파이어 코스트를 달려야 한다’라는 문구 때문이었다. 5년째 만나 식어가는 우리 사이의 온도보다 호주 남해안의 태양이 더 시급했다. 호기롭게 운전대를 잡았지만, 시드니 공항을 빠져나오자마자 와이퍼를 켜려다 깜빡이를 켜는 나를 보며 남자 친구가 안전벨트를 고쳐 맨다. 우리의 여행은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시작된다.
DAY 1 시드니 → 저비스 베이 / 몰리묵
결국 30분 만에 운전대를 넘겼다. 동승석에 앉아 상전처럼 창밖 해안 풍경을 감상하다 보니 어느덧 베리(Berry) 마을이다. 베리 사워도우 카페(Berry Sourdough Café)에서 갓 구운 빵과 커피를 마주하니 그제야 곤두섰던 신경이 풀린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쫄깃한 사워도우에 묵직한 버터를 듬뿍 얹어 베어 물자, 남자 친구가 입가에 묻은 가루를 털어주며 핀잔을 준다. 아기자기한 상점들을 구경하며 숨을 고른 뒤, 본격적인 해안 여행을 위해 저비스 베이로 향한다. 허스키슨(Huskisson) 인근의 페이퍼박 캠프(Paperbark Camp)는 숲속의 요새 같다. 조금 더 내려와 도착한 몰리묵의 배니스터스 바이 더 씨(Bannisters by the Sea)에서 셰프 릭 스타인(Rick Stein)의 신선한 해산물 요리를 마주했다. 테이블 위에 오른 요리들은 기교보다 재료 본연의 힘을 과시하고 있다. 갓 잡아 올린 듯 투명한 빛깔의 생선 살은 탄력 있게 씹히고, 은은한 허브 향의 해산물 스튜는 화이트 와인과 완벽하게 어우러진다. 특히 노릇하게 구워진 관자 요리는 씹을수록 달큰한 감칠맛이 올라와, 운전하느라 고생한 남자 친구의 입에 먼저 넣어주게 되는 맛이다.
DAY 2 몰리묵 → 버마구이
둘째 날은 야생의 부름으로 시작한다. 약 1시간 정도 이동해 모고 야생동물 공원(Mogo Wildlife Park)에 들어선다. 호주의 울창한 숲지대 속에서 기린과 사자를 만날 수 있다니, 시작부터 설렘의 농도가 다르다. 기린이 긴 혀를 내밀며 간식을 채갈 때, 남자 친구가 아이처럼 무방비하게 웃는 모습을 보니 덩달아 행복해진다. 에디터 신분을 잠시 망각하고 셔터를 눌러댔지만, 개인 소장용이라 독자들에게 보여줄 수 없는 점은 너그러운 양해를 구한다. 다시 남쪽으로 달려 도착한 버마구이 비치 호텔(Bermagui Beach Hotel) 앞바다는 이름 그대로 사파이어를 통째로 녹여 부은 듯한 빛깔로 우리를 압도한다. 야외 테라스에 자리를 잡고 신선한 굴을 주문한다. 한국의 굴이 녹진한 바다의 우유라면, 이곳의 굴은 청량한 바다 그 자체를 씹는 기분이다. 오후에는 로드 트립의 백미인 해양 액티비티를 즐길 차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수영을 호주 바다에서 거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수영을 못 한다며 머뭇거리는 남자 친구를 뒤로하고 블루 풀(Blue Pool)로 거침없이 뛰어든다. 투명한 수면 위로 스탠드업 패들보드에 올라 중심을 잡고 나니, 이곳이 바로 천국이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실감한다.
DAY 3 버마구이 → 베가 → 메림불라
버마구이를 떠나 코바고(Cobargo)를 경유하며 내륙으로 기수를 돌린다. 도착한 베가 치즈 헤리티지 센터(Bega Cheese Heritage Centre)는 자칭 유제품 애호가인 우리 커플에게는 그야말로 성지다. 빈티지 체다부터 달콤한 퍼지까지, 종류별로 탐닉하다 보니 결국 사달이 난다. 과유불급이라 했던가? 배가 슬슬 아파진다며 서로 눈치를 살피던 우리는 결국 각자 화장실로 흩어졌다가 개운해진 얼굴로 재회한다. 비워낸 만큼 다시 채우기 위해 40분 정도를 달려 해안 마을 메림불라(Merimbula)에 들어선다. 메림불라 와프 아쿠아리움 앤 레스토랑(Merimbula Wharf Aquarium & Restaurant) 창가에 자리를 잡으니, 180도로 펼쳐진 만의 풍경이 식욕을 다시 돋운다. 파노라마 뷰를 반찬 삼아 점심을 해치운 뒤, 이번 여행의 가장 기묘한 투어를 위해 팜불라 호수로 향한다. 캡틴 스폰지 매지컬 오이스터 투어(Captain Sponge’s Magical Oyster Tours)는 이름만큼이나 마법 같다. 보트를 타고 호수 위 양식장 한복판에서 굴을 직접 따서 맛보는데, 갓 딴 굴의 풍미는 결이 다르다. 오늘의 종착지는 코스트 리조트 메림불라(Coast Resort Merimbula). 테라스 너머로 비치는 호수의 잔물결을 보고 있자니, 오늘 하루의 피로가 굴 껍데기처럼 가볍게 벗겨지는 기분이다.
DAY 4 메림불라 → 에덴
넷째 날은 고래의 마을, 에덴(Eden)에 입성한다. 캣 발로우 오션 디스커버리 투어(Cat Balou Ocean Discovery Tour) 크루즈에 올라 한 시간째 미동도 없는 수면을 노려본다. “왜 이렇게 비싸게 구냐”라며 투덜대던 찰나, 거대한 혹등고래가 수면 위로 솟구쳐 꼬리로 바다를 내리친다. 전율이 일어나도 모르게 남자 친구의 손을 꽉 잡는다. 전설적인 범고래 ‘톰’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장면이 겹치며 묘한 감동이 밀려온다. 육지로 돌아와 드리프트 바 앤 레스토랑(Drift Bar & Restaurant)에서 청량한 칵테일 한 잔으로 흥분을 가라앉힌 뒤, 오후엔 키아(Kiah)로 이동한다. 키아 윌더니스 투어(Kiah Wilderness Tours)를 통해 투왐바 강에서 카약을 젓는다. 노를 저을 때마다 울창한 숲이 거울처럼 투영된 강물이 부드럽게 갈라진다. 밤이 깊어지자 벤 보이드 국립공원(Ben Boyd National Park) 안에 자리한 라이트하우스 키퍼스 코티지(Lighthouse Keeper’s Cottage)에 짐을 푼다. 19세기 양식의 하얀 건축물은 시간이 멈춘 듯 고즈넉하다. 주방 시설이 잘 갖춰진 이곳에서 남자 친구와 함께 파스타를 삶는다. 별빛 아래서 나누는 이 저녁 식사는 서울의 그 어떤 화려한 루프톱 바보다 근사한 밤이다.
DAY 5 에덴 → 타트라
다섯째 날 도착한 타트라(Tathra)는 로드 트립의 피로를 부드럽게 녹여주는 휴게소 같은 마을이다. 5일간 운전대를 잡느라 뻣뻣해진 근육을 달래기에 이보다 완벽한 곳은 없다. 유산으로 등재된 타트라 스티머 와프(Tathra Steamer Wharf) 정상에 있는 와프 로컬(Wharf Local)에서 브런치를 즐기며 오전의 여유를 만끽한다. 바다를 보며 마시는 진한 커피 한 잔에 묵직했던 머리가 맑아진다. 해변으로 내려가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나도 바다로 뛰어든다. 맑고 잔잔한 타트라의 바다는 마치 거대한 사파이어 욕조 같다. 수면 위에 몸을 맡기고 하늘을 바라보며 누워 있으니, 좋은 공기와 평화로운 풍경, 그리고 옆에서 물장구를 치는 남자 친구까지 모든 게 완벽하다는 확신이 든다. 저녁엔 팻 토니스 바 앤 그릴(Fat Tony’s Bar & Grill)에서 호주식 숯불 스테이크와 마르게리타를 즐긴다. 육즙 가득한 스테이크의 질감과 상큼한 칵테일의 조화는 오늘 하루의 근사한 마침표다. 타트라 비치 하우스 아파트먼트(Tathra Beach House Apartments)의 밝고 통풍 잘되는 객실에 누워, 창밖으로 들려오는 파도 소리를 자장가 삼아 여행의 마지막 밤을 준비한다.
DAY 6 타트라 → 시드니
시드니로 향하는 6시간의 대장정. 지루할 틈 없는 드라이브 길 자체가 이번 여행의 피날레다. 미모사 록스 국립공원(Mimosa Rocks National Park)의 해안 절경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고, 차 안은 우리의 플레이리스트로 가득 찬다. 어느새 익숙해진 오른쪽 운전석을 떠나보낼 준비를 할 때쯤, 남자 친구가 무심하게 툭 던진다. “우리, 다음에도 로드 트립 올까?” 그 질문에 답하기도 전에 눈을 뜬다. 끝없는 지평선 대신 마감이 임박해 커서만 깜빡이는 워드 문서와 미지근해진 커피가 나를 반긴다. 입안엔 여전히 사파이어 코스트의 짭조름한 파란 맛이 감도는데, 여긴 다시 무채색의 서울이다. 기지개를 켜며 노트북을 덮는다. 그리고 여전히 작업에 열중인 남자 친구의 옆구리를 툭 치며 말을 건넨다. “자기야, 이번 주말에 드라이브 갈까? 이번엔 내가 운전할게. 진짜로 깜빡이 대신 와이퍼 안 켜고.” ■
글 남세희 에디터 사진 호주 관광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