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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로 뜨거운 그곳, 뉴욕
모터트렌드홍기현 기자 2026.08.29

나에겐 남들과 조금 다른 버킷리스트가 있다. 그것은 바로, 세계의 이름난 경기장을 내 발로 직접 밟아보는 것이다. 캄프 누에서는 9만 관중이 소리치던 관중석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고, 모나코에서는 F1 머신이 스치던 가드레일 옆을 한참 서성였다. 경기장을 뜨겁게 달구는 열기, 그것을 직접 느끼고자 나의 스포츠 투어가 시작됐다. 축구와 레이스에 대한 욕구가 얼추 채워질 무렵, 내 다음 관심사는 테니스로 향했다. 세계에서 가장 큰 테니스 경기장을 품은 US 오픈의 무대, '빌리 진 킹 내셔널 테니스 센터'.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뉴욕행 티켓을 끊은 이유다. 그랜드슬램 경기장을 구경하려는 본래 계획과 달리, 이 도시에는 출석 도장을 찍을 곳이 한 군데가 아니었다. 세계 최대 마라톤이 다섯 개 보로를 가로지르고, 강 건너에는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라이벌전을 품은 스타디움이 서 있다. 도시 전체가 스포츠의 성지인 이곳. 지금부터 스포츠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한 '다이하드 팬(Die-hard fan)'의 여행이 시작된다.

STAMP 01.

퀸즈, 첫 도장

JFK에 내린 건 오후 두 시쯤이었다. 입국 심사 줄에서부터 다양한 언어가 들리는 이곳, 틀림없는 미국이다. 여행 목적을 묻는 심사관에게 관광이라고 답하며, 입국 심사를 마쳤다. 숙소는 트라이베카의 '워커 호텔'로 잡아뒀다. 1890년대 리본 공장을 개조했다는 부티크 호텔인데, 옛 벽돌과 지금의 조명이 한 공간에 있는 게 썩 마음에 들었다. 소호와 차이나타운을 도보로 갈 수 있다는 점도 장점 중 하나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방에 던져두고 다시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시차고 뭐고, 해가 떠 있는 동안 반드시 가야 할 곳이 있었다.

7호선이 지상 구간으로 올라오자 창밖으로 거대한 은색 지구본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1964년 세계박람회가 남긴 '유니스피어'. 사진으로 수없이 봤는데도 실물의 크기는 내 예상을 가뿐히 넘어섰다. 1939년과 1964년, 두 차례의 박람회를 치른 플러싱 메도스-코로나 파크는 퀸즈 뮤지엄과 뉴욕 과학관, 동물원까지 품은 거대한 공원이다. 관광객들이 걷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이번 여행의 주 목적이자 나의 오랜 꿈, '빌리 진 킹 내셔널 테니스 센터'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시즌이 아닌 코트는 고요했다. 세계에서 가장 큰 테니스 경기장 '아서 애시 스타디움' 앞에 서니, 조용한 코트에서 뿜어 나오는 무언의 압박감이 느껴졌다. 나달과 조코비치가 결승에서만 세 번을 맞붙었던 코트다. 두 사람이 밤늦게까지 랠리를 주고받던 장면을 수차례 보았고, 그 공간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 가슴 한켠이 뜨거워졌다. 유럽 축구장에서 느꼈던 것이 웅장함이라면, 이곳에서 느끼는 건 '긴장감'에 가깝다. 한 점을 위해 쉴 새 없이 주고받는 랠리. 그런 종목의 성격이 건물에도 배어 있는 것 같았다. 8월 24일부터 9월 13일까지, 이 코트는 US 오픈으로 다시 깨어난다. 낮에는 그랜드슬램의 명승부가, 밤에는 셀럽과 브랜드가 어우러진 뉴욕식 소셜 파티가 펼쳐질 예정이다. 언젠가 저 관중석 어딘가에 앉아 있을 나를 상상하며, 도장 하나를 묵직하게 찍고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공원을 나서는 길에, 스포츠를 향한 퀸즈의 야심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걸어서 닿는 거리에 뉴욕 메츠의 홈구장 '시티 필드'가 서 있고, 2027년에는 뉴욕시 최초의 축구 전용 구장인 '에티하드 파크'가 문을 연다. 올여름 월드컵까지 치른 도시다. 이 정도면 퀸즈는 도시라는 탈을 쓴 거대한 스포츠 지구임이 분명하다. 저녁은 잭슨 하이츠에서 해결했다. 130개 넘는 언어가 쓰인다는 퀸즈답게 남미와 남아시아의 냄새가 한 골목에서 섞였고, 이름도 못 읽는 메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겨우 음식을 주문했다. 옆 테이블 손님이 먹던 그 요리였다. 매콤한 향신료가 코를 찌르는데 숟가락이 멈추지 않았고, 주인장은 내 표정을 보더니 말없이 물 한 잔을 놓고 갔다. 낯선 향신료로 자축하는 저녁. 첫날의 마무리로 이만한 게 없었다.

STAMP 02.

또 다른 매력!

고백하자면, 경기장 말고도 내 여행 계획표에 필수로 들어가는 또 다른 코스가 있다. 바로 미술관, 그리고 박물관이다. 스포츠와 미술? 어울리지 않을 수 있지만, 예체능을 애정하는 나로서 여행을 오면 꼭 들러야 하는 장소 중 하나다. 첫 행선지는 어제 걸었던 공원 근처, 코로나 지역의 '루이 암스트롱 하우스 뮤지엄'으로 정했다. 테니스 센터 제2 경기장에도 적혀 있는 그 이름, 루이 암스트롱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바로 이 동네에 살았다. 평범한 주택가에 위치한 그의 집은 그대로 박물관으로 남아 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트럼펫 연주자가 이웃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던 골목. 화려한 맨해튼 대신 조용한 퀸즈를 택한 거장의 마음을, 그 골목을 직접 걸어보고 나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오후에는 지하철을 타고 록어웨이 해변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하철로 닿는 바다라니. 역을 나서 바다 쪽으로 몇 블록을 걷자 짠내가 느껴졌다. 몇 시간 전까지 마천루 사이에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풍경이 나를 반겼다. 신발을 벗고 모래를 밟으며, 해안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파도를 기다리는 서퍼들 뒤로 벌써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고, 나는 딱히 할 일 없이 모래에 앉아 저물어 가는 노을을 바라봤다. 여행 중엔 이런 '틈'이 있어야 나머지 일정도 소화할 수 있는 법이다.

저녁은 써니사이드로 돌아왔다. 20세기 초 아일랜드계 이주민들이 가꾼 동네답게 푸른 정원과 낮은 주택이 이어졌다. 몇 걸음 간격으로 간판의 언어가 바뀌는 거리를 걷다가, 가장 오래돼 보이는 동네 펍에 자리를 잡았다. 옆에서 들리는 억양이 전부 다른 걸 보니, 확실히 퀸즈가 맞다. 바텐더는 단골들의 이름을 불렀고, 나에게는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서울에서 왔고 테니스 코트를 보러 왔다고 하니, 그는 웃으며 8월에 다시 오라고 했다. 그때는 이 동네 전체가 테니스 이야기뿐이라고. 주위를 둘러보니 관광객은 나뿐인 듯했고, 혼자라는 그 기분이 퍽 나쁘지 않았다.

STAMP 03.

끝이 아닌 시작.

마지막 날 아침, 남들보다 조금 일찍 나와 조용히 센트럴파크를 걸었다. 베데스다 분수를 지나 스트로베리 필즈까지의 산책. 도시와 작별하는 나만의 독특한 인사법이다. 시간이 지나자, 공원은 러너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몇 명인지 셀 수도 없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속도로 달리고 있었는데, 사실 이 길은 그냥 공원길이 아니다. 11월 1일, 세계 최대 규모의 뉴욕시 마라톤이 펼쳐지고, 이곳 센트럴파크도 그 무대 중 하나다. 스태튼 아일랜드에서 출발해 다섯 개 보로를 관통한 뒤 42.195km를 달려 바로 이곳에서 여정을 마무리한다. 코스 어디에 서든 도시 전체의 에너지를 체감할 수 있는 대축제. 아직 꾸며지지 않은 센트럴파크를 걸으며,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찾은 곳은 브롱스다. 오래된 리테일 마켓 한가운데, 푸에르토리코 출신 라미레즈 형제가 운영하는 '브롱스 비어홀'이 있다. 뉴욕 로컬 브루어리의 수제 맥주를 종류별로 놓고 고르는 재미가 있는 곳인데, 외부 음식 반입을 환영한다길래 마켓에서 산 음식을 그대로 들고 가게에 들어섰다. 시장 상인들과 맥주홀 손님들이 자연스럽게 섞이는 풍경이 정말 미국스럽다. 11월에는 이 자리가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관람석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남은 잔을 들이켰다.

이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 내가 묵고 있는 '워커 호텔'의 지하, 코틀란트 앨리의 '스피크이지 바 세인트 튜즈데이'를 찾았다. 문을 여는 순간 나를 반기는 건 검은 가죽 벤치와 대리석 바, 1800년대 후반에 만들어진 빈티지 아이스박스와 촛불 사이로 흐르는 집시 재즈였다. 지난 100년간 뉴욕에 스며든 이민자 음악을 기념하는 무대, 사흘 동안 퀸즈에서 마주한 여러 얼굴들이 떠오르는 선곡이었다. 메뉴판을 들여다보니, 칵테일마다 만든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나는 메뉴에 없는 걸 마시고 싶어 바텐더스 초이스를 청했다. 취향 몇 가지를 묻더니, 즉석에서 착즙한 과일로 나만의 한 잔을 만들어줬다. 그 잔을 비우며 이번 여행을 천천히 되새겨 보았다. 텅 빈 코트 앞에서의 벅참, 이름 모를 요리 앞에 놓이던 물 한 잔, 8월에 다시 오라던 바텐더의 웃음, 그리고 지하철 끝에서 만난 바다. 경기 한 번 직관하지 못했는데도, 내 마음은 이미 이 도시에 빼앗겨 버렸다. 경기가 없는 날에도 뉴욕은 충분히 뜨거웠으니까.

아쉽게도 이번 여행은 여기까지다. 하지만 남은 하반기, 뉴욕을 뜨겁게 달굴 이벤트들이 줄줄이 대기 중이다. 8월의 US 오픈, 11월의 마라톤, 그리고 12월에는 강 건너 '메트라이프 스타디움'에서 미 육군사관학교와 해군사관학교의 라이벌전, 아미-네이비 풋볼이 열린다. 올해는 9/11 테러 25주년과 맞물려 그 의미가 남다르다고 하니, 하반기 뉴욕을 계획하고 있다면 일정표에 이 날짜들부터 적어두자. 물론 남 얘기가 아니다. 내 버킷리스트에도 새 칸이 하나 늘었으니까. 그 칸을 채우러 올 날짜는, 이미 정해졌다.

 

글 | 홍기현 에디터    사진 | 뉴욕 관광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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