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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시론]첨단산업 미래 경쟁력 확보, 답은 소부장에 있다

전자신문|전자신문|2026.06.07

세계 경제 질서가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과거에는 생산비 절감과 시장 확대가 산업경쟁력의 핵심이었지만, 현재는 누가 공급망을 안정적으로 통제하고 핵심기술을 자립적으로 확보하느냐가 국가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가 됐다. 특히 반도체, 배터리, 바이오, 미래차, 로봇, 디스플레이, 첨단기계와 같은 첨단산업제품은 이러한 변화를 더욱 분명하게 나타낸다. 완제품을 잘 만드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으며, 그 제품을 가능하게 하는 소재·부품·장비, 생산공정, 데이터, 인공지능(AI) 기반 제조역량까지 포함한 공급망 전체를 지배할 수 있어야 진정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최근 몇 년간 세계는 공급망의 중요성을 반복해서 확인해 왔다. 미·중 기술패권 경쟁은 첨단기술이 단순한 산업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안보의 문제임을 분명히 보여줬다. 일본의 핵심 소재 수출규제는 특정 국가나 특정 기업에 대한 의존이 얼마나 큰 산업 리스크가 될 수 있는지를 각인시켰다. 유럽 역시 전략산업 보호를 강화하며 기술 주권 확보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제 공급망은 더 이상 기업 내부의 조달 문제가 아니라 국가 전략의 중심 의제가 됐다. 산업정책의 기준도 생산량과 수출실적 중심에서 공급망 회복력, 기술 자립도, 전략품목 통제력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다.

첨단산업 경쟁이 심화될수록 한국 첨단산업의 구조적 한계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반도체, 배터리, 바이오, 로봇, 기계, 디스플레이 등 첨단산업 분야의 완제품 산업은 세계적인 경쟁력을 확보했지만, 이를 지탱하는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생태계는 여전히 불균형한 구조에 머물러 있다. 미국과 중국의 기술패권 경쟁, 일본의 핵심 소재 수출 규제 경험, 유럽의 전략산업 보호 강화는 공통된 방향을 가리킨다. 산업 경쟁력은 더 이상 생산량이나 브랜드 경쟁이 아니라, 공급망 전체의 통제력과 기술 자립도에 의해 결정된다. 즉, 산업 경쟁의 중심은 완제품보다 그 이전 단계인 소부장 생태계로 이동했다.

그럼에도, 국내 산업정책은 여전히 완제품과 특정 부품 중심의 성과에 집중되는 경향이 강하다. 반도체 투자 규모, 배터리 생산능력 확대, 자동차 수출 실적은 주요 정책 성과로 강조되지만, 이를 가능하게 하는 첨단소재와 핵심부품, 장비 산업의 구조적 강화는 상대적으로 정책 우선순위에서 밀려 있다. 이러한 구조가 지속될 경우 산업의 경쟁력 역시 외부 충격에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미 여러 번의 사건을 통해 소부장의 위험성과 중요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그 중요성이 낮아져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인식되고 있는건 아닌지 우려스럽다.

이 시점에서 중요한 전제는 지속적인 첨단산업 성장을 위해서는 반드시 AI 기술과 함께 소부장 생태계가 먼저 튼튼해야 한다는 점이다. 완제품 산업은 결과물일 뿐이며, 그 경쟁력의 본질은 보이지 않는 소부장 공급망 구조에서 결정된다. 소재의 품질이 제품 성능의 한계를 결정하고, 부품의 정밀도가 기능 완성도를 좌우하며, 장비의 기술 수준이 생산성과 수율을 결정한다. 결국 완제품 경쟁력은 소부장 기술력의 총합이다. 이 영역은 인공지능(AI)의 발전과 함께 더욱 더 중요하게 되어지고 있으며, 이는 미래 첨단산업의 경쟁력 우위확보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국내 현실은 많은 소부장 기업들이 기술력 자체는 갖추고 있지만 시장 진입과 사업화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벽에 부딪힌다. 대기업 중심의 수직적 공급망 구조에서는 중소·중견기업이 안정적인 수요처를 확보하기 어렵고, 실증과 인증, 레퍼런스 축적, 초기 판로 확보 과정도 매우 험난하다. 기술은 개발했지만 매출로 이어지지 못하고, 제품은 있지만 양산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여기에 정부 지원 역시 연구개발 중심으로 분절돼 있어 기술개발 이후 실증, 조달, 투자, 해외진출로 이어지는 성장 사다리가 충분히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개별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공급망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구조적 문제다.

이제 산업정책의 방향은 분명하다. 이와 관련해 몇 가지 정책적 제안을 하고자 한다.

첫째, 첨단산업제품 경쟁력 확보를 위해 소부장 공급망 중심으로 전환돼야 한다. 국가산업 정책은 생산능력 확대만이 아니라 핵심 소재·부품·장비의 자립도가 중요하며, 다변화된 공급망의 구축과 운영, 첨단제품의 국산화 및 고도화까지 고려해야 한다.

둘째, 소부장 기업에 대한 지원은 단순한 기술개발 지원을 넘어 전주기 성장체계를 갖춰야 한다. 기술개발 단계에서 끝나지 않고 실증, 양산, 조달, 글로벌 진출까지 이어질 수 있는 지원체계가 구축돼야 하며, 연구개발과 사업화 지원이 분절돼 있지 않은 통합된 구조를 갖춰야 한다.

셋째, 공공조달과 산업 수요를 활용한 초기 시장 형성의 촉진자 역할을 보다 적극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첨단안전, 에너지, 국방, 스마트시티 등 공공성과 산업성이 결합된 영역에서 국산 소부장 기술과 제품을 실증하고 판매할 수 있는 구조를 제도화해 산업 생태계의 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넷째, 규제 혁신과 실증 특례 제도를 혁신적으로 개선해 일회성 특례가 아니라 상시적 산업 인프라로 전환하고, 실증을 거친 기술이 신속하게 시장에 진입할 수 있도록 인증과 표준 체계도 함께 정비해야 한다.

다섯째, 소부장 산업은 장기투자와 고위험을 동반하는 기술집약적 산업으로 단기 실적 중심의 보조금 체계로는 글로벌 경쟁력을 만들어 갈 수 없다. 따라서, 정책금융, 성장펀드, 기술가치 기반 투자모델을 통해 기업 성장의 사다리를 만들어야 한다.

여섯째, AI 기반 제조혁신은 소부장 산업 경쟁력의 핵심 인프라로, 스마트팩토리, 디지털트윈, AI 품질관리, 데이터 기반 생산 최적화는 개별 기업의 경쟁력 문제를 넘어 산업 전체의 기본 구조로 내재화해야 한다.

이와 더불어 산업 플랫폼의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 협회와 전문기관, 지역 혁신클러스터, 연구기관, 수요기업이 따로 움직여서는 공급망 경쟁력을 만들기 어렵다. 기술 연계, 수요 발굴, 실증 매칭, 공공조달 연결, 해외시장 진출을 하나로 묶어내는 산업 허브가 필요하다. 특히 한국첨단안전산업협회와 같은 플랫폼 조직은 중소기업이 가장 어려워하는 시장 연결 문제를 구조적으로 해소하는 핵심 축이 될 수 있다. 개별 기업의 역량만으로는 넘기 어려운 장벽을 산업 생태계 차원에서 함께 갖추는 방식이 필요하다.

결국 국가경쟁력의 본질은 눈에 보이는 수출 성과만이 아니라, 위기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산업구조를 얼마나 갖추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소부장 생태계 활성화 없이는 첨단산업 경쟁도 지속될 수 없다. 소부장 생태계가 견고해질 때, 비로소 첨단산업 경쟁력 역시 지속가능한 형태로 완성될 수 있다. 이를 위해 어렵지만 개별기업 뿐 아니라 첨단산업 전체가 우리에게 희망이 있음을 인지하고 도전하고 성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끝으로, 1957년 미국의 심리생물학자인 커트 폴 리히터의 쥐를 이용한 실험을 소개하고자 한다. 물이 담긴 유리관 속에 쥐를 넣고 얼마나 오래 헤엄칠 수 있는지를 관찰한 것인데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연구진이 탈진 직전의 쥐를 꺼내 살려준 뒤 다시 물속에 넣는 실험을 반복한 결과 놀랍게도 쥐들은 이전보다 훨씬 오래 버티기 시작했다. 바로, 살아날 수 있다는 가능성, 즉 '희망'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무언가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존의 차이를 만든 것이다. 이 실험은 단순히 동물행동학의 사례가 아니라 오늘날 첨단산업 정책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람도 사회도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을 때 도전하고 투자하며 혁신한다. 반대로 가능성이 보이지 않으면 도전은 멈추고 산업은 위축될 것이다. 대한민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통신 인프라와 제조 역량, 그리고 정부의 강력한 AI 정책 등 훌륭한 토양을 가지고 있다. '길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다'라는 말을 강조하며 대한민국의 첨단산업의 도약을 기대하고 응원한다.

박광영 숭실대 소프트웨어학부 교수 1004pky@ssu.ac.kr

〈필자〉 숭실대 소프트웨어학부 교수이자 AI융합연구원 지역지능화사업단 산학부단장, 지역인재양성협의체 부위원장으로 현재 한국첨단안전산업협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한국정보처리학회 부회장, 한국IT전문가협회 부회장, 한국경영기술지도사회 중소기업혁신연구원 부원장, 국회 지역소중포럼 산업정책분과위원, 행정안전부 자문위원, 국립경찰대학 치안정책연구소 자문위원을 역임했다. 현재 경찰청 치안산업진흥협의회 위원, 서울시, 서초구 스마트도시 정책자문, 구로구 4차산업혁명 자문위원, 한국재난안전산업협회 이사, 한국정보처리학회 상임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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