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미래 기술 내세운 지방선거, R&D 공약이 없다
||2026.05.23
||2026.05.23
명절을 맞아 고향에 내려가면 새로 길이 나고 건물이 올라간 탓에 종종 낯선 느낌을 받았다. 고향 사람들은 도지사나 시장이 바뀌면 늘 무슨 무슨 단지로 길을 닦고 터를 다진다고 말했다. 이번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는 좀 다르다. 저마다 인공지능(AI)·반도체·바이오·우주 등 미래 기술을 앞세웠고 구시대적 토목 사업 공약은 줄었다. 이공계 출신 후보도 늘었다.
그렇다면 이제 지방이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보할 수 있을까. 아직 선거 운동이 진행 중이라 단언하긴 어렵지만 지금까지 상황을 보면 과거 종합 선물 세트처럼 포장지만 바뀌었지 내용은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수도권에서 잘하고 있는 대기업이나 공공 기관을 지방으로 옮기겠다는 말부터 먼저 눈에 띈다. 아랫돌 빼서 윗돌 괴면 지역은 물론이고 대한민국 전체가 흔들릴 게 뻔하다.
과학계는 이런 모습이 낯설지 않다.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 산하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 19곳은 전국에 61개 지역 조직을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평가에서 우수 등급을 받는 지역 조직은 손에 꼽을 정도다. 선거 때마다 정치권이 압력을 행사해 울며 겨자 먹기로 지역 조직을 만든 적이 많기 때문이다. 그나마 애써 좋은 연구 장비와 인력을 내려보내도 같이 일할 현지 기업이나 대학 인력이 부족해 큰 성과를 내기 어려웠다.
지방의 소멸 위기를 R&D로 극복하는 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출연연 지역 조직 중에도 성공한 사례가 있다. 대표적인 예가 한국과학기술원(KIST) 강릉분원 천연물연구소이다. 대한민국에서 이 분야로는 유일한 정부 연구 기관이다. 서울 본원에서도 하는 연구 중 일부를 맡은 곳이 아니라 해당 분야를 통째로 전담한 덕분에 천연물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이곳이 1순위가 될 수밖에 없다. 걸어서 10분 거리에는 천연물 특허 기술로 창업한 기업들이 모인 강릉과학산업단지도 있다.
결국 지방이 R&D로 성공하려면 어디로 가든지 인력이 모일 만한 고유의 역량이나 인프라를 갖춘 연구 기관이 있어야 한다. 고만고만한 연구 기관들을 그러모으거나 연구비를 좀 더 준다고 갑자기 그 지역이 연구 중심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지역에서 주축이 되는 기업들에 꼭 필요한 기술이 무엇인지 찾아서 정부 연구소의 해당 R&D 역량을 그곳으로 집중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대기업의 역할도 중요하다. 해외에는 지방정부가 기업과 손잡고 낙후된 도시를 첨단 연구 도시로 키운 사례가 많다. 네덜란드의 림뷔르흐주에 있는 브라이트랜드가 대표적인 예이다. 광산이 폐쇄되면서 빛을 잃은 도시가 첨단 소재와 데이터, 헬스케어 중심의 혁신 클러스터(집적지)로 발전했다. 현재 이곳에는 테크 기업 497개사가 1만6020개의 일자리를 제공하며, 1만3717명이 이 지역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다.
브라이트랜드에서는 우리로 치면 대한석탄공사 같은 DSM이 석유화학·바이오 중심의 민영 기업으로 변신해 클러스터에 대한 투자를 책임졌다. 대기업이 스타트업을 키우고 지역 대학들과 공동 R&D를 이끈 것이다. 우리나라도 비슷한 사례가 나왔다. 포스코는 2021년 포스텍(포항공대)에 벤처 육성 센터인 체인지업 그라운드를 열었다. 지난해 기준으로 이곳에서 스타트업 183개가 나와 1900여 명을 고용했다. 기업 가치 합계는 2조3000억원에 이른다.
포항에서 차로 한 시간 안에 갈 수 있는 거리에는 현대자동차와 HD현대중공업, 울산과학기술원(UNIST)이 있는 울산이 있다. 정부 연구소들이 핵심 인력과 인프라를 집결시키면 대기업과 함께 혁신 클러스터로 키울 만하다. 해외의 혁신 클러스터처럼 정부 연구소나 대기업의 연구자들이 지역 대학에서 교수를 겸직하면서 기업이 필요한 인재를 키우고 기술을 개발할 수 있다.
대구경북, 광주전남, 대전충남, 부산경남도 같은 방식으로 달라질 수 있다. 어디든 지방정부가 기업, 연구 기관, 대학과 머리를 모으면 공해 도시에서 반도체 R&D 도시로 변신한 독일 드레스덴이나 도산한 조선소 부지에 연구 중심 대학을 세워 국제 도시로 성장한 스웨덴 말뫼가 될 수 있다.
모처럼 첨단 기술이 자주 회자되는 이번 지방선거가 지방의 R&D가 발전하는 기회가 됐으면 한다. 무엇보다 전국의 과학기술 인재들을 유치하는 지역 공약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연구자들이 지방에서 살고 싶을 정도로 좋은 정주 여건을 내거는 공약 말이다. 이를테면 우리 지역에 오면 가족에게 제주도의 국제학교나 수도권 대형 병원 수준의 교육, 의료 혜택을 주겠다고 하면 어떨까. 받겠다는 생각보다 무엇을 줄지 먼저 고민하는 지방선거 후보들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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