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범죄 구심점이 디지털 공간으로 이동하고 있지만, 경찰의 수사 역량은 여전히 물리적 공간에 머물러 있다. 특히 텔레그램 등 익명성이 높은 온라인 메신저만으로 모든 범죄가 가능해지면서, 이들이 '범죄단체'임을 증명하는 것조차 난항이다. 최근 수도권을 중심으로 발생한 '범죄대행' 등 전형적인 조직 형태를 보여도 경찰 수사망은 '말단 행동책'에 멈출 수밖에 없다. 강력범죄와 사이버 범죄 등 이종 범죄가 빠르게 융합하고 있는 반면, 경찰은 여전히 '칸막이식' 수사법을 고수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20일 서울남부지검은 양천구 등지에서 불특정 다수에게 의뢰를 받고 남의 집에 오물을 뿌리고 래커칠을 하는 등 '테러 대행'을 벌인 일당 3명을 구속기소했다. 개인정보를 빼내기 위해 배달 업체에 위장취업한 A씨와 총책 B씨 등은 정보통신망법과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혐의를 받고, 실제 테러를 실행한 행동책에게는 주거침입과 재물손괴 혐의도 적용됐다. 그러나 정작 경찰이 이들에게 적용했던 범죄단체조직 혐의는 빠졌다. 검찰은 경찰에게 해당 혐의에 대해 보완수사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초 경찰은 해당 사건에 총책과 지시책, 행동책 등이 함께 벌인 조직범죄로 보고 범죄단체조직죄를 적용하기로 했다. 특히 지난 6일 박정보 서울경찰청장은 "텔레그램 등 보안 메신저를 이용한 범죄도 반드시 검거된다. 의뢰자부터 공범까지 추적할 것"이라며 수사에 자신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조직실체와 지휘 체계 등을 입증할 실질적인 증거를 확보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풀이된다.
현행 형법은 범죄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 또는 집단을 조직하거나 이에 가입 또는 구성원으로 활동한 사람을 그 목적한 죄에 정한 형으로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조직적으로 행해지는 범죄가 개인 범죄보다 사회적 해악이 훨씬 커, 범죄단체의 존속 자체를 막으려는 취지다. 실제 범죄를 실행한 '행동책'이 아니어도 해당 조직에 속하기만 하면 범죄를 실행한 것과 같은 처벌을 받는다.
이는 그간 조폭 등 현실상의 폭력조직에 적용돼 조직을 '일망타진'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최근 범죄대행 단체 등 폭력조직 형태도 디지털 공간에서 결성되면서 이들의 '체계성'을 수사하는데 제동이 걸렸다. 의뢰, 상담, 지시, 실행 등 전형적인 조직의 형태를 띠며, 내부적으로 직급 역시 갖춰져 있음에도 모든 과정이 텔레그램과 같은 보안 메신저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모든 증거가 메신저에 있는데 이를 개별 휴대전화에서 삭제하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디지털 포렌식으로도 복구가 불가능하다. 조직범죄가 인정되지 않으면, 이는 말단 행동책의 '개인 범죄'로 일단락된다. 수사당국이 범행을 지시하고 체계를 운영한 '윗선'을 파악해도 법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혐의가 없는 것이다. 지능범죄뿐 아니라 폭행 등 강력범죄 조직도 디지털 공간을 활용한 '꼬리 자르기'로 활개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범죄 형태의 구분이 흐릿해지고 있지만, 경찰 조직은 여전히 온라인 범죄와 오프라인 범죄에 대한 수사를 따로 운영하고 있다. 강력범죄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사이버 수사 인력을 한시적으로 파견하거나 전담팀을 임시로 구성하는 식이다. 짧은 기간 서버에 저장되는 디지털 증거를 확보하기에는 대응이 늦는 것이다. 이에 '사이버 조직범죄 수사' 등 통합적인 수사 기능이 강조된다. 이윤호 고려사이버대 경찰학과 석좌교수는 "한국이 미국 등 경찰 조직에 비해 너무 세분화돼 있어 수사 영역간 칸막이가 있는 것이 사실"이라며 "이들이 상시 공조할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