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법과 편법 경계 ‘창고형 약국’… 안전한 약 판매 근간 흔들어 [아듀 2025]
||2025.12.29
||2025.12.29
올해 약사 사회와 보건 당국을 동시에 흔든 키워드는 단연 ‘창고형 약국’이었다. 약국의 외형과 운영 방식이 대형마트를 닮아가면서 의약품 유통 질서와 국민 보건 안전을 둘러싼 논쟁이 연중 이어졌다.
관련 업계 소식을 종합하면 논란의 불씨는 지난 6월 경기 성남에서 문을 연 대형 약국에서 시작됐다. 수백 평 규모 매장에 수천 종의 일반의약품과 건강기능식품을 마트처럼 진열하고, 소비자가 카트를 끌며 직접 상품을 고르는 방식은 기존 동네 약국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대량 사입을 통한 저가 판매, 가격 정보의 전면 노출, 장시간 영업까지 더해지며 이른바 ‘마트형’ ‘창고형’ 약국이라는 이름이 빠르게 확산됐다.
이 같은 운영 방식은 성남을 시작으로 수도권과 지방 대도시까지 퍼졌다. 대전·대구·부산 등지에서 유사한 형태의 약국이 등장했고, 일부 사례에서는 대형마트 입점이나 숍인숍 형태 가능성까지 거론됐다.
소비자들 사이에서는 ‘약값이 싸다’는 반응이 나왔지만, 약사 사회의 시선은 달랐다. 가격과 규모 경쟁이 약국 운영의 중심으로 자리 잡을 경우, 약국이 단순 판매 공간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빠르게 퍼졌다.
우려는 현실이 됐다. 대한약사회는 일부 창고형 약국에서 슈도에페드린 성분이 포함된 조제용 의약품이 일반 상품처럼 다량 진열된 사례를 공개했다. 슈도에페드린은 감기약 성분으로 쓰이지만, 불법 마약 제조에 악용될 수 있는 대표적인 전구물질이다.
현행 제도상 판매 수량과 방식이 엄격히 관리돼야 하지만 대량 진열 환경에서는 복약지도와 판매 관리가 느슨해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여기에 탈모약, 동물용 의약품, 수험생 피로회복제 등 특정 수요층이 몰리는 제품의 가격과 판매처 정보가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확산되면서 ‘성지 약국’ 현상도 다시 고개를 들었다.
전북 전주의 한 약국이 ‘최저가’ ‘성지’ 등의 표현과 함께 질환명을 간판에 내걸었다가 보건소의 시정 요구를 받은 사례는 가격 경쟁이 약사법 취지와 충돌할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약사 단체들은 창고형 약국이 약국 생태계 전반을 흔들 수 있다고 경고했다. 지역 단위로 형성된 약국망은 단순 판매 기능을 넘어 복약지도, 의약품 관리, 응급 대응이라는 공공적 역할을 수행해 왔는데, 대형화·박리다매 구조가 확산될 경우 이러한 기능이 약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일부 품목이 특정 대형 약국으로 쏠리면, 지역 보건 안전망이 한쪽으로 기울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정부도 결국 제동을 걸었다. 보건복지부는 약국 명칭과 표시·광고를 제한하는 약사법 시행규칙 개정안을 내년 1월 7일까지 입법예고하며 ‘창고형’ ‘마트형’ ‘성지’ ‘특가’ 등 가격·규모 경쟁을 암시하는 표현 사용을 제한하겠다고 밝혔다.
우월성·최대·최초 등을 강조하는 표현 역시 규제 대상에 포함됐다. 제도상 창고형 약국이라는 별도 정의가 없는 상황에서 우회적 경쟁을 차단하겠다는 신호로 해석된다.
다만 규제의 실효성을 둘러싼 논란은 여전히 남아 있다. 약국의 면적과 진열 방식, 소비자 동선이 어디까지 허용되는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고 대형마트 입점이나 ‘매장 안의 매장(숍인숍)’ 형태가 확산될 경우 기존 규제 틀로 관리가 가능한지 아직 불투명하다.
실제 연말을 앞두고 초기 논란의 중심에 섰던 약국이 폐업과 개설자 변경 절차에 들어가면서 다른 지역에서 유사 모델이 재등장할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내년 전망은 엇갈린다. 일부에서는 초기 관심 이후 매출과 사입량이 줄어들며 창고형 약국 모델의 지속 가능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반면 대형 유통 공간과 결합한 약국 모델이 제도적 공백을 파고들며 형태를 바꿔 재등장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의약계 관계자는 “올해 창고형 약국 논란은 약국이 ‘얼마나 싸게 파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공간이어야 하는가’라는 본질적 질문을 던진 사건이었다”며 “내년에는 이 질문에 대한 제도적 답변이 나올지 아니면 또 다른 회색지대가 만들어질지 보건 당국과 약사 사회의 선택이 시험대에 오를 전망이다”고 말했다.
김동명 기자
simalo@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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