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배터리 기업들이 전기차 시장 둔화에도 불구하고 대형 공급 계약을 연이어 체결했다. 북미와 유럽에 구축한 생산 거점이 안정적 공급망으로 평가받으면서다. 글로벌 완성차와 에너지 기업들은 중국 중심 조달 구조를 조정하는 과정에서 국내 배터리 기업을 새로운 공급처로 선택하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12월 8일 메르세데스-벤츠와 2조원대 전기차 배터리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올라 칼레니우스 벤츠 회장이 지난달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에서 LG 전장 계열사 경영진과 회동한 지 한 달여 만이다.

관련업계는 LG에너지솔루션이 하이엔드 중심 공급사에서 중저가형과 표준형까지 포트폴리오를 넓힌 점이 메르세데스-벤츠의 전동화 전략 변화와 맞물리면서 이번 계약으로 이어졌다고 평가한다.

LG에너지솔루션은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9월까지 3차례에 걸쳐 벤츠와 총 157.5GWh 규모의 배터리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이번까지 4번째 계약이 더해지며 양사 협력 범위가 확대됐다. 이 물량은 차세대 원통형 배터리 46시리즈에 해당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LG에너지솔루션은 연내 오창공장에서 46시리즈 양산을 시작하고, 내년부터 미국 애리조나 공장에서 본격 공급에 나설 계획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벤츠 외에도 테슬라, 벤츠, GM 등 다수의 글로벌 완성차 업체와 공급 계약을 체결하며 고객 기반을 넓히고 있다. 테슬라의 경우는 전기차용 원통형 배터리를 공급하는 한편 2027년부터 3년간 6조원 규모의 에너지저장장치(ESS)용 공급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삼성SDI는 12월 10일 미국 에너지기업과 2조원 규모의 ESS(에너지저장장치)용 LFP 배터리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그동안 삼원계(NCA) 기반 배터리 중심의 사업 구조를 유지해온 삼성SDI가 LFP 시장에 본격 진입한 첫 신호탄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올해 삼성SDI는 독일 상업용 ESS 기업 테스볼트, 마이크로모빌리티 기업 등과 ESS용 배터리 공급 계약을 체결하며 최근 비(非) EV 분야 고객군을 빠르게 확장하고 있다.

우리나라 배터리 기업들이 연이어 대형 계약을 확보한 배경에는 ‘탈중국’ 흐름 속에서 더 안정적이고 믿을 수 있는 공급망을 제공한다는 점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 북미·유럽 현지에 공장을 직접 구축해 물량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고, 지정학 리스크가 낮아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이 안심하고 조달처를 다변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국내 기업이 중국 업체의 대체재로 부상했다.

SK온은 두 경쟁사와 달리 최근 대형 수주 발표는 없지만, 사업 구조 전환을 위한 조직 개편에 속도를 내고 있다. SK온은 ESS 전담 조직을 신설하고 미국 조지아주 SK배터리아메리카 공장과 국내 충남 서산 공장의 일부 라인을 LFP 기반 ESS 배터리 생산 체제로 전환하는 작업을 추진 중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전기차 시장 성장세가 둔화하는 상황에서 국내 배터리 기업들이 전기차 배터리 의존도를 낮추고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며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이 공급망을 재정비하면서 수주 흐름에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어, 앞으로는 기술력과 원가 경쟁력이 더 중요한 기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선율 기자
melody@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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